1990년대,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GUI)가 PC에 꽃피면서 “시작 버튼을 누르면 세계가 열린다”는 말이 유행했다. 윈도우 3.0·3.1은 ‘아이콘을 클릭하면 프로그램이 뜨는’ 새 문화를 만들었고, 윈도우 95는 시작 메뉴·플러그앤플레이·인터넷 익스플로러(IE) 번들로 90 %가 넘는 시장 점유율을 달성했다. 그러나 IE 묶어팔기는 1998년 미국 법무부의 반독점 소송으로 이어지며 ‘윈텔 제국’의 그늘을 드러낸다. 2부에서는 GUI 혁명, IE 전쟁, 그리고 법정 파장까지 MS 전성기의 빛과 그림자를 추적한다.
1. 16비트에서 32비트로 ― 윈도우 3.0·3.1과 GUI 대중화
1990년 5월 뉴욕 자비츠센터. 빌 게이츠는 2,000여 명 개발자·언론 앞에서 “PC는 이제 그래픽 세상으로 간다”며 윈도우 3.0을 데모했다. 파스텔 톤 배경 위 창이 겹겹이 띄워지고, 마우스를 움직여 파일을 ‘드래그-앤-드롭’하자 객석에서 탄성이 터졌다. 윈도우 3.0은 386 가상메모리, GDI, 16색 아이콘, 프로그램 관리자·파일 관리자를 도입하며 “도스 셸”이 아닌 “진짜 운영체제” 이미지를 구축했다. 사용자는 AUTOEXEC BAT‧CONFIG SYS를 만질 필요 없이 예쁜 아이콘을 클릭해 워드·페인트브러시·카드게임을 실행할 수 있었고, 개발자는 Windows SDK와 MFC 덕분에 표준 메뉴·대화상자를 손쉽게 썼다. 4개월 만에 100만 카피가 팔려 나가며 PC 호환기 제조사는 “윈도우 인증” 스티커를 붙이기 시작했고, 로터스·워드퍼펙트·오토데스크·시만텍 등 주요 소프트웨어 업체가 줄줄이 ‘윈도우 전용’ 버전을 선보였다. 1992년 윈도우 3.1은 TrueType·OLE 2.0·멀티미디어 MCI를 얹어 글꼴 부드러움·앱 간 복사&붙여넣기·CD음악 재생을 제공했고, 6개월 만에 300만 카피를 돌파했다. 경찰서 전산실·회계 법인·대기업 사무실에 네트워크 버전(WfW 3.11)이 깔리자 “GUI OS=윈도우”가 상식이 됐다. 하지만 16비트 GDI 핸들·64 KB 리소스 한계·DOS 부트 구조로 인한 ‘블루스크린’과 GPF는 여전했다. 빌은 완전 32비트 커널·시스템 가상화·긴 파일명·PnP·인터넷 내장이라는 다섯 가지 목표 아래 코드명 시카고를 비밀리에 밀어붙였다. 그 결과물이 바로 윈도우 95다.
2. “시작”을 눌러라 ― 윈도우 95·IE 번들 전략과 전 세계 90 % 점유율
1995년 8월 24일, 마이크로소프트는 시애틀 캠퍼스에서 윈도우 95 론칭 파티를 열고 롤링스톤스 〈Start Me Up〉 사용료로 300만 달러를 지불했다. 뉴욕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에는 거대한 윈도우 로고가 투사됐고, 전 세계 PC 전문점 앞엔 자정 판매를 기다리는 인파가 줄을 섰다. 윈도우 95는 32비트 하이브리드 커널·가상 DOS 머신·VFAT 긴 파일명·플러그앤플레이·새 드라이버 모델을 통해 “설치만 하면 작동”하는 경험을 제공했다. 무엇보다 시작 버튼·작업 표시줄·바탕화면 바로 가기 UI는 초보자도 즉시 적응할 만큼 단순했고, 탐색기는 파일 관리 방식을 혁신했다. MS는 여기에 넷스케이프가 독주하던 웹 브라우저 시장을 겨냥해 ‘Plus! Pack’에 인터넷 익스플로러 1.0을 번들했고, 1996년 OEM Service Release (OSR) 2부터 IE를 아예 CAB 파일에 통합했다. PC 부팅 → 자동 다이얼업 → IE로 바로 웹 진입이라는 식의 편의성은 극적이었고, 1997년 IE3 ActiveX·메일·자바가상머신·JScript·VBScript 탑재는 포털·온라인뱅킹·게임업체가 “IE 전용” 사이트를 만들도록 자극했다. 넷스케이프 점유율은 2년 만에 72 %→42 %로 급락, 1998년에는 IE가 50 %를 돌파한다. 윈도우 95는 첫해 4,000만 카피, 3년 누적 1억 카피를 기록했으며 PC 제조사 OEM 탑재율은 92 %에 달했다. 시장은 “컴퓨터를 켠다 = 윈도우를 부팅한다 = IE로 인터넷을 쓴다”로 단순화됐다. 그러나 멀티미디어 확장(MM Extensions), DirectX 3D API, 오피스 97 ‘클리피’까지 깊숙이 윈도우에 얹히자 경쟁사는 “마이크로소프트가 플랫폼을 사유화한다”고 반발했고, 드디어 미 법무부·20개주 검찰이 1998년 5월 ‘독점 남용’ 소송을 제기한다.
3. 법정 전쟁 ― 반독점 소송과 API 공개 의무, 그리고 게이츠의 퇴진
〈United States v. Microsoft Corp.〉 재판은 1998년 가을부터 2001년 여름까지 미디어 생중계로 진행됐다. 검찰은 “윈도우 지위를 이용해 IE를 강제 설치·삭제 불가 처리해 넷스케이프·자바·로터스 노츠 등 경쟁 기술을 억눌렀다”고 주장했고, 내부 이메일 ‘We are going to cut off Netscape’s air supply’가 증거로 제시됐다. 빌 게이츠는 비디오 증언에서 질문마다 “기억나지 않는다” “맥락이 다르다”를 반복해 여론의 역풍을 맞았다. 2000년 4월 예비판결에서 토머스 잭슨 판사는 “MS는 OS 독점력을 경쟁사 배제에 활용했다”고 적시, 같은 해 6월 회사 분할 명령을 내렸다. MS 주가는 하루 만에 15 % 폭락했고 NASDAQ 버블 붕괴와 맞물려 IT 업계가 흔들렸다. 하지만 2001년 6월 항소법원은 절차상 문제를 근거로 분할 판결을 파기, 대신 API 공개·OEM 자유·감시 위원회라는 구제책으로 마무리됐다. MS는 비공개 SPI 문서를 외부 개발자에 공개하고, PC 제조사가 윈도우 바탕화면에서 IE 아이콘을 삭제하거나 타 브라우저를 기본값으로 설정해도 계약상 불이익을 주지 못하게 되었다. 소송 와중에 터진 멜리사·러브레터 웜 사태로 MS 이미지는 바닥을 쳤고, 2002년 빌은 “Trustworthy Computing” 메모를 배포해 보안 개발 수명주기(SDL)를 도입했다. 동시에 그는 CEO 직을 스티브 발머에게 넘기고 ‘수석 소프트웨어 아키텍트’로 후퇴했다. 소송은 MS의 무제한 확장을 막았지만 IE 점유율은 2002년 95 %에 도달했고, PC 생태계는 여전히 ‘윈텔 표준’ 위에서 돌아갔다. 그러나 그사이 구글이 검색·광고로 부상하고, 애플은 OS X·아이팟으로 반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윈도우 3.x가 GUI를 대중화하고, 윈도우 95가 인터넷을 거실로 끌어들이는 동안 마이크로소프트는 90 % 점유율로 ‘윈텔 제국’을 완성했다. 그러나 IE 번들 전략은 법정 폭풍을 불러왔고, API 개방·OEM 자유 조치는 MS의 무한 확장에 제동을 걸었다. 3부에서는 XP·.NET·엑스박스로 영역을 넓히는 한편, 스마트폰 전환에 늦어 혹독한 시련을 겪는 MS 중흥기와 모바일 좌절을 살펴본다.